단군[檀君]
  글쓴이 : 예감사주     날짜 : 13-08-25 12:17     조회 : 4262     추천 : 0     트랙백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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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건국 시조.


단군에 대한 전승은 13세기에 나온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 이래로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들 문헌에서 단군이 한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시조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단군의 계보 등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하늘 신 환인(桓因)의 아들인 환웅(桓熊)이 지상으로 강림하여 웅녀와의 사이에서 단군을 낳았고,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하여 1500년 동안 통치하다가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제왕운기』는 환웅의 손녀와 박달나무 신[檀樹神]이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으며, 단군은 1038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또 권근(權近, 1352~1409)의 <응제시(應製詩)>에서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했으며, 단군의 재위 기간이 1000년이 넘는다고 한 것은 실은 단군의 자손이 대대로 이어가면서 통치한 햇수를 합산한 것이라 했다.
이밖에 환웅과 백호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전승, 환웅이 곰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고 여우와 혼인하여 기자(箕子)를 낳았다는 전승도 있다. 이 가운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단군의 계보를 천신과 연결하고, 재위 기간도 1500년가량인 데다가 마지막에도 산신으로 좌정했다고 하여 단군을 신격화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응제시>는 단군의 조상 계보에 침묵하고 재위 연수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등 단군의 신화적 면모를 최소화하면서 역사적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렇듯 단군에 관한 전승은 다양하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전승이, 특히 『삼국유사』의 전승이 단군신화의 원형에 가까울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응제시>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단군을 재해석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응제시> 전승이 각종 문헌에 채택되는 등 단군에 대한 표준적인 전승이 되었다.
조선시대를 통하여 단군의 역사적 위상은 확고해졌다. 국가 차원에서 단군을 시조로서 제사했으며, 단군의 무덤을 찾음으로써 단군이 산신이 아닌 인간임을 확실히 했다. 나아가 조선 후기에 나온 역사서에서는 단군의 치적이 언급됨으로써 단군의 역사성은 더욱 강조되고, 마침내 한말에는 단군 인식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즉 단군은 민족의 시조이고, 우리 민족은 다 같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봉건적 신분제 사회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국왕과 노비가 같은 조상, 한 핏줄이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말에 오면서 외세의 침입 앞에 민족의 단결이 필요했고, 민족의 단결을 위해서는 구심점이 필요했다. 바로 이러한 요청에 부응한 것이 단군이었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자손이기 때문에 뭉쳐야 할 당위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말에는 단기 사용(1905), 개천절 기념(1909), 단군교 창립(1909) 등 단군과 관련한 각종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단군은 민족의 시조라는 인식을 비롯하여 현재 남북한이 공유하고 있는 단군 이해의 틀은 한말을 거치면서 성립된 것이다.
단군에 대한 역사화 작업이 진행되는 한편으로 단군을 신격화하고 숭배하는 전통도 꾸준히 이어졌다. ‘단군’이란 말의 의미는 ‘무당’으로 풀이되며, 따라서 단군은 고조선의 통치자인 동시에 최고 사제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단군 자신이 신격화되기도 했다. 이것은 고조선의 조상신이었음은 물론 산신으로 좌정됐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군을 숭배하는 전통은 고조선 이래로 계속되었다고 보이지만, 이것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때는 고려시대부터이다. 10세기경부터 황해도 구월산에는 단군을 비롯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환인·환웅을 함께 모시는 삼성당(三聖堂)이 있었고, 이곳은 영험 있는 기우처로 대접받았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황해도 지방에 전염병이 창궐했는데 그 원인을 삼성당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탓으로 돌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군 숭배의 전통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새로운 종교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19세기말~20세기 초 평안도 지역의 김염백(金廉伯)이나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백봉(白峰) 등의 단군운동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앙운동은 마침내 1909년 대종교의 출현을 가져왔다.
단군신앙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온다. 한 흐름은 신종교로, 다른 하나는 민간신앙 내지 무속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한국의 신종교 가운데 단군을 모시는 교단은 30여 개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단군을 주신으로 받드는 곳도 있지만,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모시는 종단도 있다. 한편 민간신앙에서 단군은 마을신앙의대상으로 숭배되었다. 일제시대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경상남도 함양과 강원도 양양 지방에서 동제 때 단군을 모셨다. 오늘날에는 서울 동빙고동 부군당에서 단군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여러 신과 함께 모시고 있다.
무속에서도 단군을 받들고 있다. 20세기 전반에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무당내력(巫黨來歷)』이나 『무당성주기도도(巫黨城主祈禱圖)』에서는 무속의 원류를 단군에서 찾고 있다. 즉 무속은 단군에서 비롯한 신성한 민족 전통이며, 제석거리·별성거리·대거리·성조거리 등이 모두 단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무속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국문화계에서 시민권을 얻고자 하는 움직임의 일단으로 볼 수 있다. 현전 무가에서도 단군이 사설에 등장한다. 영일 지방 골맥이굿이 그것이다. 그러나 동제든 무속이든 간에 단군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집필
서영대(徐永大)/인하대학교
참고문헌
三國遺事
巫黨來歷
帝王韻紀
육당 최남선 전집 2. 최남선. 현암사, 1973.
단군-그 이해와 자료.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편. 서울대출판부, 1994.
部落祭. 村山智順. 조선총독부, 1937.


츨처:
[네이버 지식백과] 단군 [檀君]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신앙사전(무속신앙 편), 200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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